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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97년 한국 외환위기의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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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코리아

97년 한국은 IMF의 구제금융에 서명했다. 대한민국의 외환위기이다. 사실 한국의 외환위기란 말 보다 동아시아 금융위기라는 말이 더 정확하다. 한국에 국한적으로 일어난 일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에 거의 같은 이유로 위기가 왔기 때문이다.

 

이미 여기에 대해 여러가지 자료가 많다. 각종 지표나 복잡한 용어들에 머리가 어지러워 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표, 수치 등 복잡한 용어들은 최대한 사용하지 않고 나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이야기를 풀어나가 보려고 한다. 외환위기사태 본질은 무척이나 간단하다. 돈을 빌렸는데 못 갚은 거다.

 

 

플라자 합의

우리나라는 경공업 중심 산업에서 중화학공업 중심 산업으로 넘어가기 위해 많은 돈을 국내외에서 빌렸다. 그 돈으로 많은 산업에 투자를 해서 중화학공업을 육성시켰다. 일본, 미국 등 나라에서 어깨너머 배운 기술들을 이용 제품을 생산해나가기 시작했다. 일본의 엔화 가치 상승 그리고 85년 9월 22일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미, 영, 프, 독, 일 대표들이 모여 어떠한 합의를 한다. 그 유명한 플라자 합의이다.

 

플라자 합의.미중무역전쟁의 결과는 이미 나와있다.

지금 현재 진행중인 미중무역분쟁이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가져다 준 플라자 합의를 연상케 한다. 2019/06/06 - [돈과 관련된 모든 이야기] 미중무역전쟁 미중무역전쟁 장기화 되는 무역전쟁 지난해부터 시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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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엔저로 인해 대일본 무역적자가 심각한 미국은 이 합의를 통해 엔화를 절상시킨다. 그 여파는 꽤 아니 많이 컸다. 엔화는 계속해서 가치가 올라 87년 말에는 엔화는 무려 120엔이 된다. 플라자 합의는 일본 화폐가치를 상승시켰고 한국 아니 동아시아 전체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엔화 가치 상승 수혜 입은 동아시아

엔화 가치는 상승했고 한국은 그 수혜를 가장 많이 입었다. 엔고로 가격경쟁력을 갖게 되었고 3 저호황에 올림픽에 한국은 엄청난 수출을 하게 되고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하지만 그 기간은 짧았다. 88년도 이후 원화가치를 올리라는 미국의 압력을 받기 시작했고 오일쇼크 등으로 원유 가격도 상승했다. 호황 때 번 그 많은 돈은 부동산, 주식으로 흘러들어 가 버블을 생산하는 동시에 수출제품의 경쟁력을 떨어뜨렸고 경기침체와 무역수지 적자가 시작되었다.

 

 

플라자 합의 이후 일본과 한국

(잃어버린 20년의 사실상의 시작) 일본은 플라자 합의 이후 불황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침체된 경제를 살리기 위해 금리를 인하하여 돈을 풀었지만 그 돈은 기업의 생산적인 투자나 연구개발로 들어가지 않고 한국과 마찬가지로 주식과 부동산에 흘러가게 된다. 이 돈이 너무 과하게 들어가 "도쿄를 팔면 미국을 산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부동산 버블이 형성되었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89년 12월에 토지기본법 제정을 하고 대출 규제를 시작하였는데 이를 기점으로 자산 가격이 하락을 시작했다. 자산 가격의 하락으로 땅을 팔아도이자는커녕 은행 원금도 다 못 갚는 지경으로 이르면서 대출금 회수가 불가능 해져갔다. 일본의 금융위기가 점점 가까워진 것이다.

 

그런 일본을 금융위기로 바짝 모는 사건이 터졌다. 95년 1월 고베 대지진이 발생한 것이다. 6300여 명이 사망, 1400억 달러 규모의 손실이 발생시킨 엄청난 일이었다. 장기불황에 빠진 일본을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게 만들고 있었다. 그 해 4월 18일 80엔이 붕괴되었고 긴장한 세계는 역플라자 합의를 하게 된다. 엔화의 가치를 낮추는 합의를 한 것이다. 세계에서 경제 비중을 많이 차지하고 있는 일본이 경제위기를 맞게 되면 세계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고려한 합의였다.

 

 

플라자 합의 이후 수혜를 입었던 동아시아와 한국에게 역플라자 합의는(95년) 악재로 다가왔다. 합의 그다음 해에 한국은 경상수지 적자가 230억 달 러그 전년도 89억 달러로 적자폭이 두배 이상 늘어나는 참사가 일어났다. 그 적자 폭만큼 외채를 단기로 가져왔고 96년 말에는 단기외채 가전체 외채의 68% 수준이었고 외환보유액의 두배가 넘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아무 도그 위험을 감지하지 못했다. 정부는 96에 OECD를 가입했고 국민소득만 달러에 취해 서서히 차 오르는 위험을 느낄 수가 없었다.

 

 

동아시아 금융위기의 시작

(태국 바트화 공격) 태국도 한국과 똑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플라자 합의로 수혜를 입었었고 역플라자 합의로 수출 감소로 인해 단기외채가 증가하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 그 유명한 조지 소로스가 바트화에 가치 폭락에 배팅 후에 폭락을 유도하였고 97년 7월에 바트화는 폭락하였다. 태국 정부는 환율방어를 위해 달러를 다 소진하여 버렸지만 실패해버렸고 빚을 갚아야 할 날이 다가왔다. 당연히 돈은.. 달러는 없었다. 동아시아 금융위기가 시작했다.

 

한국을 향하는 의심의 눈초리

한국기업들은 이미 과도한 부채로(전체 기업 중 30퍼센트가 부채비율 400퍼센트 ) 부도나는 기업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한보의 주력사였던 철강은 97년 1월 23일 부도 처리되었고

2019/06/26 - [돈과 관련된 모든 이야기] 한보그룹 한국 최대 금융비리사건

 

한보그룹 한국 최대 금융비리사건

며칠 전 한보그룹 회장의 아들 정한근 씨가 송환되었다. 해외도피 중에 체포되어 송환되었는데 그의 소지품에서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의 사망진단서가 나와 사망설이 나돌고 있다. 정태수 한보그룹의 회장이자 IM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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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진로, 기아 등이 화의 신청을 하고 끝내는 해체 또는 주인이 바뀌었다. 이런 상황이 이어지자 일본은행들은 만기 대출 연장을 거부하고 나섰다. 그렇게 줄줄이 시작되었다. 구제금융을 받네 안 받네 하기도 하고 모나토리엄 선언하자고 하기도 하고 미국과 일본에게 직접적으로 달러를 빌려 오려는 시도도 했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결국은 IMF의 지원을 받았다. 25프로라는 이자와 함께 말이다. IMF 기간 동안 우리나라는 많은 자살자와 신용불량자를 만들며 암흑의 시간을 보내었다. 단순히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나날이었을 것이다.

 

고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관치금융이 사라졌고(적어도 외환위기 전보다는 확 줄었겠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고 여러 금융제도 등이 법제화되어 기업의 상태를 훨씬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은 2000년 8월 23일

IMF 관리체제에서 제일 먼저 졸업하였다.